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엘랑 비탈 (문단 편집) == [[근대]] [[프랑스군|프랑스 육군]]의 공격적 군사교리 ==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공격정신 / Offensive à outrance, Attaque à outrance''' 유래는 1번 문단이다. 이 사상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결정적 요소는 전상자의 수나 상대국 영토의 획득 여부가 아니라, 야전지휘관이나 국가지도부가 전쟁을 지속할 의사가 있으냐 없느냐에 있다고 파악한 사상이다. 따라서 전쟁이란 지도부가 졌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진 게 아니며 이러한 전쟁지속의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군의 높은 사기가 담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벌써 비과학적인 [[의지드립|의지주의]]적 관점이 엿보이는데, 아니나 다를까 엘랑 비탈은 이 군의 '''사기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왕성한 공격정신을 강조'''했다. 이는 프랑스군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 [[보어 전쟁|보어전쟁]], [[러일전쟁]]에서 [[기관총]], [[야포]] 등의 진보된 화력 장비의 위험성에 대하여 인식하지 못한 채 [[보병]]돌격을 고집하게 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이론이었다.[* 물론 이러한 [[공격]] 중심의 사고, 특히 보병의 [[착검돌격]]에 대한 로망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당대 거의 모든 군대에서 가지고 있던 통념이었다. [[프랑스]]의 문제는 이런 통념을 이론화하고 전군에 강요하다시피 [[세뇌]]교육을 실시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심지어 '모든 화기의 진보와 발달은 공세의 강화에만 도움이 되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이는 '[[기관총]]'이라는 딱 세 글자로 반박할 수 있는 말이다. 요즘의 일선 보병들이 거의 분대마다 하나씩 들고 다니는 경기관총이 없던 시절인 만큼 기관총은 당대의 대표적인 [[방어]]용 화기였다. 이를 집대성한 인물을 1차대전의 명장 [[페르디낭 포슈]] 육군 [[원수(계급)|원수]]로 꼽지만 정신론과 사기론만 중시하는 엘랑 비탈 교리는 포슈 장군의 군사사상과 멀리 벗어난 이단에 불과했다. 포슈가 엘랑이란 개념을 언급하며 프랑스 육군의 정신력의 우월성, 정신력의 중요함을 설파하고 공세를 추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신론은 포슈의 군사사상의 일부에 불과하고 포슈는 정찰대를 통한 정보 탐색, 적군의 동향을 주변 정보를 바탕으로 예측하라는 점, 우월한 병력과 화력에 대한 중요성, 포병과 보병의 합공, 예비대 운용법, 한 방법만 고집하지 않은 유연한 대응의 중요성 등 [[나폴레옹 전쟁]]과 보불전쟁의 교훈과 [[클라우제비츠]]의 사상을 접목한 군대 지휘의 여러 면모를 다룬 사상이다. 물론 우월한 화력이 방어력을 증대하리라 예상 못한 것은 상당한 문제지만 포슈의 군사 이론을 정신론 하나로 요약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간단히 말하면 "할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철저히 준비하여 용감하게 공격하라."는 문구에서 앞을 다 떼버리고 "용감하게 공격하라."는 문구만 남긴것이다.] [[중세]] 후기에서 [[근세]], [[근대]]에 이르는 긴 기간동안 [[프랑스]]는 생산력과 [[인구]], 그리고 이에 기반한 [[육군]] 전력에서 [[서유럽]] 최강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며, 특히 프랑스 대혁명 이후 국민국가가 탄생하고 [[국민개병제]]가 도입되면서 다른 경쟁국가들을 압도하는 소위 '대육군'을 갖추는 데 성공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때는 [[기관총]], [[폭탄]], 고성능 [[야포]] 등이 나오기 전이라, 방어군이 공격군한테 병력수에서 밀린다면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13세기|13]]~[[18세기]] 서유럽의 프랑스에선 지휘부가 전의를 잃지 않고 [[장병]]들이 높은 사기를 바탕으로 계속 공세를 유지할 수 있다면, 종국적으로 승리가 가능하다는 이론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공방 양쪽간에 화력과 기동력의 차이가 크지 않은 조건에서 계속 공세를 퍼부으면 방어자는 지속적인 전력 손실으로 결국 무너질 수 밖게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적국보다 우월한 전력(병력 수)을 동원할 수 있는 프랑스 육군은 정보 수집이나 병력 운용 등 전술적 측면에서 크게 실수하지 않고 공세만 유지한다면 결국은 승리할 수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초기까지만 해도 비단 프랑스 뿐만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독일과 영국의 많은 장교들도 엘랑비탈의 바탕이 되는 정신론에 공감하고 있었다. 이는 [[전열보병]] 시대의 영향이었다. 전열보병 시대의 전투에서는 포탄과 총알 세례를 견디며 와해되지 않고 대오를 유지하는게 가장 중요하였다. 만약 대열이 붕괴하게 된다면 패주하는 과정에서 적의 일제사격 몇번을 맞아주는 것보다 더 큰 손실이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나폴레옹 시대 이후 유럽 본토에서는 대규모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보수적인 군 장교단은 여전히 구시대적인 교리를 따랐던 셈이다. 그런데 20세기 들어서 기술의 발전으로 고성능의 [[기관총]]과 [[야포]]가 등장하면서 우월한 화력에 기반해서 방어자가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즉 공격자와 방어자간의 병력 손실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이 점을 정확하게 보여준게 바로 1차대전의 [[참호전]]이다. 고작 3킬로미터를 전진하기 위해서 몇만 명이 하루만에 죽어나가는 대참사는 기관총과 [[철조망]]으로 보호되는 방어군의 참호를 아무리 보병을 밀어넣어 봐야 뚫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기동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전통적인 기병은 무력화되었지만, 아직 새로운 기병인 전차(와 항공기)는 미약했기 때문에 방어자가 공격자에 대해 절대적인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게다가 19세기말 [[독일 통일|독일이 통일되면서]] 이제 프랑스는 서유럽 최대의 인구 대국도 아니게 되었다. 즉 기술의 발전으로 전투의 양상도 달라졌고, 프랑스의 최대 강점이었던 인구 우위도 상실한 상황. 공업화 이전 육군 강국 프랑스의 전성기를 기준으로 보면 합리적인 교리 체계이지만 20세기 이후의 프랑스를 기준으로 보면 영광스러운 과거의 추억에 지나치게 집착한 다분히 시대착오적인 교리였다. 문제는 정신론과 사기론이 워낙 매력적인 탓에 포슈의 제자들은 포슈의 군사사상에서 정신론을 제외한 대부분은 사장되고 형이상학적인 "엘랑"만 강조하게 된다. 포슈가 [[육군대학]] [[교장]]이던 시기 프랑스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 그랑메종(Loyzeau de Grandmaison) 육군 대령은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의 교육총감에 취임하자마자 '엘랑 비탈'에 기반한 신 전투교령을 공포, 이것에 반대 의견을 보낸 [[장교]]들은 가차없이 퇴역시켰다. 그리곤 1913년에 개전된 야전교범에서 '''"향후는 공격 이외의 어떠한 [[전술]]법칙도 배제한다."'''라고 선언해 버렸다! >프랑스 육군은 대육군의 영광스러운 전통에 복귀해야 하며, 오직 정면 공세 이외의 어떠한 작전 행동도 인정해서는 안된다. … (중략) … 모든 공세행동은 그것을 궁극적으로 관철 할 수 있도록 강인한 정신력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며, 이는 종국적으로는 [[총검 돌격]]으로 적의 전열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것으로 귀착된다. 이러한 전과는 오직 피를 흘려야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 육군은 향후 이 외의 어떠한 구상도 전쟁의 본질을 오도하는 것으로 판단, 배제해야 한다. > - 그랑메종 육군 대령 엘랑 비탈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명문으로 마른강의 기적이라 칭하는 제1차 [[마른 전투]]에서 포슈 장군이 말한 "나의 중앙은 무너지고 있고 우익은 철수 중이다. 그야말로 상황은 최고이다. 나는 공격할 것이다."가 있다. 그러나 포슈가 실제로 이 발언을 했을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당시 포슈를 보좌하던 [[막심 베이강]] 장군부터 이를 부정했으며 당시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도 미묘하게 부정한 적이 있다. 그리고 포슈가 남긴 또 다른 명언 중 엘랑 비탈과 관련된 것으로 승리, 그것은 곧 의지다.(Victoire c'est la volonte.)가 있다. 왕성한 [[공격]][[정신]]의 강조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에서의 삽질을 반성하고자 '위대한 군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시절의 전통[* 나폴레옹은 체스를 할때도 이 전통을 지켰는데 나폴레옹의 체스는 굉장히 공격적으로 오직 공격만이 미덕이던 낭만주의 시대의 체스를 잘 나타낸다.]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셈인데 사실 보불전쟁에서의 패전은 정치권의 외교적 실패와 군 지도부의 무뇌스런 전술전략때문에 말아먹었지 의지나 정신력이 부족한 탓으로 진 건 아니었다. 사실 포슈의 군사사상의 맥락을 안다면 포슈의 발언은 와전된 것으로 포슈도 지도부의 무능한 전술전략을 탓했으며 아예 [[프로이센]]의 승리는 프로이센군이나 몰트케의 유능함이 아닌 프랑스군의 무능함 하나만으로 결판난 것이다 라고 평가한 사람이다. 포슈가 분석하는 보불전쟁의 패배는 절대방어주의에 사로잡혀서, 몰트케의 삽질로 인해 빈틈을 보이던 프로이센군을 공격하지 않은 것과 느린 기동때문에 방어를 하더라도 적절한 시기에 증원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꼽았다. 그리고 [[의지드립]]은 [[요기 베라|졌다고 생각할 때까진 진 게 아니다]]는 오래 전부터 있는 군사 격언이고 딱히 그 시절 [[프랑스군]]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나폴레옹이 비슷한 말을 한 적도 있다. "전투의 물리적 요소보다 정신적 요소가 3배나 중요하다. 끝까지 싸우는 자가 승리한다." 승리란 적의 전투의지를 꺾는 것이란 말을 남길 정도로 전쟁에서 정신적 요소를 강조했다. 나폴레옹 이전 18세기 최고의 군인으로 불리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조차도 "뻔뻔한 자만이 전쟁을 승리한다"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을 정도다. 문제는 나폴레옹 시절은 100년 이전이고 화력 수준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커졌다는 것이다.[* 전투의지를 극히 중시하는 위와 같은 관점들 역시 당시의 군사적 상황이라는 맥락 속에서 성립된 것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연발 자동사격이 가능한 총기나 고성능 폭발물등이 없었던 전근대까지는 전장에서 투사될 수 있는 파괴력 자체가 제한적이었고, 따라서 다수의 병력이 한 방에 몰살당하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던 것. 예를 들어 근세 유럽의 전쟁터를 풍미한 밀집 보병 방진을 생각해 보자. 근대~현대의 전쟁이라면 적당한 위치에 배치된 기관총(하다못해 자동소총)이나 파편 비산 효과가 있는 수류탄이나 고폭탄, 보병의 반격을 무시하고 단숨에 보병 대열을 돌파해버릴 수 있는 전차등으로 인하여 이런 밀집 보병 방진은 정신력이고 전투의지고 따질 것도 없이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물리적, 생물학적으로 '''몰살''' 당해버릴 것이다. 하지만 전장에서 투사될 수 있는 파괴력 자체가 제한적이었던 18세기 [[라인배틀]] 시대라면? 머스킷 총의 연사속도는 분당 수 발 정도에 불과했고, 질량탄을 사용하는 당시의 대포 역시 그 살상능력은 포탄의 비행 궤도상에 서 있던 불운한 병사들로 제한되었던 것. 즉, 적의 공세에 노출되면 부대가 말 그대로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근현대전과는 달리 근세 이전의 전장에서는 강력한 공세에 노출된 상태에서도 병력 자체가 깡그리 몰살당하는 일은 쉽게 발생하지 않았고, 따라서 조직력만 유지 가능하다면 공세를 감당하면서 전투행동을 지속하는 것 역시 가능했단 것이다. 따라서 이 당시의 전장에 투입된 부대들은 정말 실질적 피해를 입어 부대가 무너지기 전에 부대 유지에 필요한 조직력을 상실하여 패퇴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당시의 주요 전략가들이 승리의 조건으로 정신력, 전투의지를 강조한 것 역시 이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당장은 적의 공세에 노출되어 불리한 상황에 처해있더라도 부대의 전투의지와 조직력만 유지되면 상당한 시간을 버텨낼 수 있고, 이를 통해 전황을 역전시키는 것도 가능했던 것. 결국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의 합리성이 있던 관점이 화력 수준의 엄청난 폭증으로 시대에 맞지 않는 관점으로 변화한 것.] [[독일]]의 군사 전략자인 클라우제비츠가 왕성한 공격정신을 강조했다고 하나[* 전쟁은 국가의 '의지'를 관철하는 것~~ 이런 식의 의지드립과 전투의지를 강조하는 문구가 있긴 한데 역시 독일어 원본 자체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프랑스어판 번역의 병크질에 독자들이 '의지'에 너무 심취한게 아니냐는 설도 있다. 영문판으로 1970년대 이후 번역은 전투의지를 '전투에 필요한 지성'으로 번역하는 경향이다. 현재 제일 최근판 한글번역(김만수 대전대 군사학 연구소)에서도 '국가의 의지'는 '정치적 목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클라우제비츠는 "공격은 적극적이지만 약한 수단이고, '''수비는 소극적이지만 강력한 수단'''이다"라고 쓴 것도 있다. 또한 1812년 자신이 직접 참전한 러시아 전역에서처럼 대규모의 적군은 국경 안으로 깊숙히 끌어들여 소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교리에 대한 평가는 개인적으론 클라우제비츠를 맹렬히 비판한 [[리델 하트]] 경조차 '''"저거 쟤네들 클라우제비츠를 잘못 읽은 거다"''' 평할 정도다.[* 전쟁론 이펙트 (Clausewitz's on war) -휴 스트레이천-][* 그러나 리델 하트가 <포슈: 오를레앙의 남자>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심각한 포슈까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역시 영국인-- 나름대로 백일 전투는 인정해준 것 같지만 포슈를 삼류 공세주의자인양 묘사하게 된 계기가 바로 리델 하트의 <포슈: 오를레앙의 남자>다. 그리고 포슈를 비롯한 유명한 군사사상가들을 분석한 <군사사상론>의 경우에는 포슈를 당대 군사사상가 중 클라우제비츠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인물로 꼽았다.] 1차 대전 당시 BEF(영국 대륙 원정군) 육군에서 복무했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의 평가도 "개인적으로 지휘관이 졌다고 할 때까지 진 게 아니다"라는 말에 원칙적으로 공감한다면서도 '''"그러나 지휘관은 의지보다 사리판단이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장군의 공적은 [[병사]]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 때 같이 싸웠던 프랑스군 수뇌부를 디스했다. 몽고메리는 한 술 더 떠 1차대전 초기 프랑스 육군 사령관 조프르 장군에 대하여 "그 사람은 전술의 기본을 모른다."라며 아주 대놓고 깠다.[* 조프르는 마른의 기적의 공과 고착화된 서부전선의 과의 양면성이 존재하는 인물이지만 1차대전 초기에 조프르의 뚝심이 없었다면 패배가 확실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몽고메리의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프랑스군-영국군의 불화와 상호불신은 큰 편이었다. 전쟁 말기 1918년 4월에야 통합사령부를 구성할 정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군 평가가 박한 것도 주류인 영미 쪽의 평가가 박하기 때문인 점도 어느 정도 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광탈과 식민지에서 벌어진 추태들이지만 말이다.] 이처럼 엘랑 비탈은 명백히 무모하고 무의미한 피해를 조장하는 전술교리였다. 총포와 철조망 대신 '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짜인 교리는 엄밀하게 교리라고 하기도 미안한 소리고, 구체적으로 전술상 이론으론 결함이 크며 초반 프랑스 육군의 졸전과 큰 피해를 준 교리였다는 점을 어느 면을 보더라도 부인하기 어렵다. 초기 전역에서 일방적으로 패퇴하여 수도의 코앞까지 적군이 진격해오던 상황에서 마른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것도 공격정신이라기보단 [[독일 제국군|독일 제국 육군]] 제1군과 제2군 사이의 간격이 너무 벌어져서 역습받게 생기니까 자진해서 후퇴한 면이 컸고 애초에 [[파리(프랑스)|파리]] 코앞까지 적이 들어온 것도 400만에 달하는 독일 육군의 [[예비군]] 동원 병력을 잘못 예측한 조프르 장군의 삽질 탓이 컸다. 물론 전쟁의 향방을 돌릴 수 있었던 것도 포슈 장군이 엘랑 비탈의 정신 그대로 왕성한 공격 정신을 유지하여 독일 육군에게 역습을 당할 것이라는 위기감을 주어 공세를 포기하게 만들었다는 옹호론도 있겠으나, 개전 초기 3달 이후 서부전선에서 프랑스 육군의 지속적인 공세로, 1차대전 당시 수비가 공격보다 극단적으로 유리하다고 감안할 때 명백하게 실패한 전술이다. 개전 초반 최대 공업지대인 북프랑스에 영토적, 경제적 피해를 입었던 프랑스가 무모한 공격을 시도한 것도 감안해야겠고 싸우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프랑스 지도부의 엘랑 비탈 정신이 기여한 점도 일부 있긴 하겠지만 막대한 피해가 있었다. 특히 인명피해는 너무 극심했다. [[독일군]]이 200만 명 전사, [[프랑스]]가 140만 명 전사로 전사자 수는 독일이 더 컸다지만, 독일군은 [[동부전선]], [[발칸반도]], [[아나톨리아]], [[아프리카]] [[식민지]], 대 [[이탈리아]] 전선까지 포함한데다 인구는 더 많았다. 프랑스도 서부전선에서만 싸운 게 아니라 발칸전선의 [[https://en.m.wikipedia.org/wiki/Louis_Franchet_d%27Esp%C3%A8rey|프랑셰 데스페레]]장군과 군대를 파견한 것, 갈리폴리 전투에 6만명의 병사를 파견한 일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일이고 그저 덤일 뿐인데다가 거의 전 전력이 본토 내에서 있었다는 건 변함이 없다.[* 이는 다소 편향이다. 오히려 독일이야말로 동부전선을 빼면 일시적인 일이고, 프랑스야말로 비주류 전선에 대한 상시 파견 비율이 더 컸다. 독일군 전력 상당수는 대부분의 기간동안 서부/동부전선에 주둔해 있었고, 발칸반도와 이탈리아 전선에서 수십만을 동원했으나 공격전 한번 할 때 일시적으로 동원했으며, 그리고 다른 전선에서는 병력이 적은 편이었다. 반면 프랑스는 1915년부터 종전까지 발칸 반도에 수십만 대군을 주둔시켰으며, 독일처럼 아프리카나 이탈리아 전선에도 병력 일부와 물자를 보내주었다. 따라서 동부전선을 빼고 본다면 프랑스가 오히려 독일보다 더 전력이 분산된 상태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동부전선을 포함한다면 독일이 더 분산되었지만.] [[1913년]] 기준 독일 인구는 6500만 명, 프랑스 인구는 3900만 명으로 거의 독일이 5/3배였다. 반면 프랑스는 전선의 몇몇 부분[* 영국군이 더욱 큰 비중을 자랑했다는 1917년 말에도 영국군은 겨우 150km의 전선을 담당한 반면 프랑스군은 무려 580km의 전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 전선거리 보다 영국쪽이 맡은 지역은 독일의 주침공로이고 프랑스군이 맡은 지역보다 병력 밀도도 높고 자연 지형이 없는 개활지라 병력 손실 비율은 영국군이 높았다. 또한 4차에 이은 이프르 전투중 가장 큰 규모인 3차 이프르 전투 (파스샹달 전투)에선 독일군과 영국군이 나란히 22~26만씩 손실을 냈다. 북해쪽과 프랑스 동북지역 전선은 영국쪽 부담이 컸다.한편 1차 솜 전투 또한 전통적인 시각으로 영국군이 지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William Philpott등 수정주의자들은 영불공동작전으로 평가한다. 사상자가 영국군이 42만, 프랑스가 19만 6천 명 정도인 걸 감안하면 영국군이 주도한 건 맞다. 프랑스군이 베르됭에 집중하느라 솜 전투에서 역할은 없었다라는 말도 존재하는데 영미사관을 대변해 영문 위키백과 솜 전투 항목에서 포슈도 제대로 언급하지 않음에도 솜 전투에 대해 "The main part of the offensive was to be made by the French Army, supported on the northern flank by the Fourth Army of the British Expeditionary Force.라고 적었다. 게다가 이 전쟁과 악명높은 베르됭 전투가 동행되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은 [[영국군]]과 [[벨기에군]], 후반에는 [[미군]]까지 담당한 걸 감안하면 인명 피해가 엄청났다. 더구나 프랑스는 공격이 아닌 자국 영토에서 수비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전쟁 초기를 제외하면 독일군이 1914~1915.겨울 이후 1918년 공세까지 수세적 입장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무엇보다 [[19세기]]부터 비롯된 저출산에 따른 고령화 국가에서 청년 인구가 다 날아가버렸다는 건 치명타가 아닐 수 없었다.[* 당시 프랑스의 젊은 인구층은 전체 인구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여자 빠지고 다 빠지고 나면 140만의 전사자는 18 ~ 27세 남자인구의 27%에 달했다. 이러한 인구 타격은 전쟁 후에도 프랑스가 다시 강대국 지위를 유지하는데 엄청난 제약 조건이 되었고 2차대전의 패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정신나간 공격정신 탓에 140만의 전사자 가운데 60만 명은 첫해 1914년의 5개월 간 발생했다. 수비가 더 유리한 걸 감안하면 엄청난 피해를 봤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1915년 이후 전장에서 큰 피해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프랑스군은 공격 교리 일변도의 경직된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물론 초반 병크를 겪으면서 지탄을 받자 이것은 '공격정신'에 대한 '오해다'란 변명도 나왔다. 이 같잖은 변명은 프랑스군의 계속되는 처절한 삽질로 '공격정신'이란 물건이 하등 쓸모가 없었다는 것이 속속 드러나면서 조용히 묻혔지만.] 공격 시엔 영국군과 합동작전은 미약했지만 서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충분한 포격 뒤에 공세를 취했고 방어 시에도 긴밀한 종심방어를 취하기도 했다. 종심방어는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건 아니고 독일군 프랑스군 모두 전선이 형성되다 보니 선형방어의 취약함을 깨닫고 1차 2차 3차에 달하는 참호선을 방어진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직 정신 못 차린 높으신 어른들은 정치인들과 의지력 높은 똥별들은 그딴 걸 왜 하냐고 독전과 총살질 병크로 병사들을 죽음에 몰아넣기 바빴다. 완벽한 승리를 보장했던 [[니벨 공세]]가 실패하자 이에 반발하여 일개 병사들도 아닌 사단장들이 무의미한 공격에 항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로베르 니벨]]은 북아프리카로 좌천당해 다시는 서부전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베르됭의 영웅 [[필리프 페탱]] 원수 덕에 추스릴 수 있었다. 페탱은 엘랑 비탈 교리를 반대하고 화력 중심 교리를 설파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현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매우 부조리하거나 무능하게 보이지만 어느 정도의 변명은 할 수 있는 교리였고 수많은 사상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방법 외에는 [[참호전]]을 타개할 방법이 없었다.[* 물론 몇몇 프랑스군 [[똥별]]들의 삽질때문에 피해가 커진 감이 있긴 하다. 이 때문에 1차 대전 당시 여러 나라들이 비슷하게 참호전 타개책을 펼쳤음에도 프랑스가 더 주목받아 까인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참호전은 프랑스 구로우 장군이 개발한 종심 방어 교리나, 포슈가 개발한 이동탄막사격 등으로 새로운 전술을 만들어냈다. 사실 1차대전 [[독일군]]도 이 엘랑 비탈에 대항하여 비슷하게 [[참호전]]을 한 적도 많으며, [[러시아군]] 역시 마찬가지지만 이건 당시 군사계에서 유행하던 '선빵, 공격이 최고, 수비는 불리함을 자초하는 일'이라는 개념의 영향과 전쟁 초기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의 실패와 전선 고착화로 자기들이 하던 게 안되고 다른 선택지는 거의 없는 상태에서 최선의 행동을 하다보니 그런 것일 뿐이다. 게다가 이것조차 엘랑 비탈과 비슷하다고 보고 싶은 관점으로 봐야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독일이나 러시아나 처음부터 엘랑 비탈스러운 행동은 하지 않았다. 특이하게도 일본군은 근대 초기에는 화력집중을 기반으로 한 교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부족한 생산력을 통감하고 정신력을 강조하는 교리로 후퇴하고 만다. 이때 참고한 것 중 하나가 이 엘랑 비탈이다. 시간이 지나 이에 경도된 일본군은 2차 세계대전에서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보병돌격을 감행하다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만다. 독일군은 [[양면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슐리펜 계획]]과 [[지헬슈니트]] 작전, [[임무형 지휘체계|유연한 사고와 높은 자율권]]을 가진 정예 장교단과 정예 부사관단, 적극적인 선봉대와 전투단 운용, 육군 중심의 제병합동을 망라한 독일식 [[기동전]]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했고 러시아군은 엘랑 비탈에 영향을 받았지만 오히려 좋은 쪽으로 어레인지 했다. 즉 닥치고 소총만 든 알보병이 아니라 소수의 엘리트 장교들이 본부에서 통제하는 가운데 짠 작전과 기관총부대, 전차, 항공대 등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화력지원을 받아가면서 체계적인 돌격을 했다. [[우라돌격]] 과 [[소련군의 종심돌파이론]]참고. --그리고 프랑스군은 이 엘랑 비탈에 철저하게 당하고 결국 공격해야 할 때 방어만 하는 바람에 [[프랑스 침공|또 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